pencil and colored pencil on paper, 595×419(mm), 2019

pencil and colored pencil on paper, 595×419(mm), 2019

첫 번째 놀이

Ólafur Arnalds - Only The Winds

일정하게 반복되는 건반 소리에 홀려 그 음을 가만히 따라갔다. 그렇게 당도한 곳은 텅 빈 공간이었다. 오롯이 혼자 있음에 안도했고, 불안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주에 홀로 표류된 듯, 지나온 길도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보이지 않았다. 음악은 긴장을 고조시키며 불안을 북돋아 주었고, 나는 그 불안에 머물며 거듭 매혹되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불안은 얼마 후 정점에 다다르고, 옅은 긴장과 함께 홀연히 흩어졌다.  

음악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옅은 떨림은, 긴장을 놓지 않고 몰입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주위를 살펴주었다. 자전거에 손을 몰래 떼어내며, 아이가 홀로 서는 과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아버지의 온정을 닮은 배려. 음악은 불안에 혼자 머무를 수 있게 그 시작과 끝을 지켜주는 가족이고,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의도된 것과 의도치 않은 것

명확하고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들의 힘을 느슨하게 만들고 싶었다.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나뭇잎과 산의 형태에 힘을 덜어내, 아래로 유연하게 늘어지는 형상으로 표현했다. 수면에 비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셈해지지 않게 비틀어 놓음으로써 환상과 현실의 구분을 흩트려 놓고자 했다. 이미지든 생각이든 뭐든. 명확한 틀을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그림을 그리며 발견한 것은, 일부러 일그러트린 형태의 경계를 더욱 명확하게 다듬으며 안도하는 자신이었다. 그 모습은 작업에 몰입할수록 자주 드러났고, 형태를 묘사할수록 더욱 치밀해졌다. 불편했다. 틀을 없애려 할수록 틀에 갇히는 내 모습이 언짢았고, 그것이 그림으로 드러나는 것이 힘들었다. 의도하는 바와 작품에 드러난 이미지 사이의 어긋남을 어디든 탓으로 돌리고 그 불편함으로부터 당장 빠져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작업은 계속되어야 했고, 좀처럼 긴장을 떨치지 못하는 내 모습에 점점 힘이 빠져갔다. 

무력감 속에 파묻혀 있던 나는 조심스레 생각했다. 이것은 놀이이고, 작업을 통해 내 결여가 슬쩍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그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내 유약함이 긴장의 형태로, 이미지의 경계를 애써 다지는 형태로 드러났을 뿐이라고. 작업자로서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섬세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를 달랬다. 내가 애써 감추려 하는 무엇이 더 명확히 드러날 수 있도록 그 애씀을 그저 바라보면 된다고. 

완성된 그림에는 강박적인 긴장과 그 유약함을 관조하는 여유가 함께 스며있었다. 그림은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 그림이 누군가의 불안을 건드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움틀었고, <Only The Winds>가 그랬듯 관람자의 불안이 단단한 여유가 되어 돌아올 수 있도록, 그 곁을 세심히 지켜주는 동반자가 될 수 있기를 깊이 바랐다.


법과 질서에 의해 경직된 세계와 현실 너머의 유연한 세계를 수면을 경계로 대치시켰다. 앙상한 나뭇가지는 그 세계의 공허함을, 울창하게 우거진 푸릇한 식물들은 그 세계의 풍족함을 표현한다. 

올빼미는 외밀함 extimité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다. 주체의 내부 중심에 있지만 외부에 존재하는 방식을 취하며,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어디에나 위치하며 어디에도 포획되지 않는다.   

먼저, 그림은 거울단계에서 아이의 나르시시즘을 불러일으킨 거울 이미지와 실제 아이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는 최초의 분열 지점을 표현한다. 나뭇가지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불안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올빼미는 자아가 생성되기 전 아기의 내적 상태를 상징하며, 어머니에게서 몸은 분리되었지만 아직 합일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아기의 의식 세계를 표현한다. 어머니와 하나라는 환상에 빠진 아기의 내면은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과 실재적 팔루스로 인한 불안이 함께하는 모순적 공존 상태이다. 어머니의 따듯함이 감싸는 평온한 세계이자 불안이 감도는 복잡 미묘한 세계. 그 묘한 따듯함이 분위기를 모호하게 뭉뚱그린다. 

손가락 네 개에 온몸을 의존한 올빼미는 어머니를 향해 무한한 사랑을 갈구하듯,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올빼미의 시선은 실재적 대상a가 상징계의 주체를 응시하는 시관충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최초의 시각 경험은 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바라보아짐을 당하는 경험”이다. 그 어머니의 시선은 성충동으로 우리에게 강렬하게 남아 ‘응시’를 출현시키는데, 그 응시는 시각 기능이 약해질수록 강해지고, 기능을 되찾으면 힘을 잃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짙은 어둠에 노출되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는 것은, 어둠으로 시각 기능이 상실됨으로써 응시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의 올빼미는 눈이 표현되지 않는다. 시선을 숨긴 올빼미는 관람자를 묵묵히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관람자를 응시에 노출시킨다. 관람자는 올빼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고, 그림을 보는 내내 바라보아짐을 당하는 입장에 내몰리게 된다. 

또한 올빼미는 응시에 노출된 상징계적 존재의 괴로운 내적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배경 음악: 최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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